이태영 여사님

<이태영 여사님 약력>
1914년 8월 10일 평북 운산군 북진읍 진동에서 2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남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에 입학
1936년 수석졸업
1936년 정일형 박사와 결혼
1946년 32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 (서울대 최초의 법대 여학생)
1952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최초의 여성변호사가 됨-당시 38세)-이승만 대통령이 야당인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판사임명을 거부
19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설립
1958년 김흥한 변호사와 이&김 법률사무소 설립(현재의 김·장·리 법률사무소의 모태가 된 최초의 로펌)
1958년 세계여류법률가 협회 부회장
1969년 서울대학교 법학박사, <한국이혼연구>
1975년 라몬 막사이사이상 수상
1998. 12. 17.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



<주요 업적 및 일화>
한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최초의 여성 법학박사, 최초의 여성법과대학장 등 이태영 여사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많은 수식어가 따라 다닙니다. 이태영 여사님이 변호사로서 활동하던 당시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흔히 안순애 여사 간통사건(1958년) 이라고 알려진 사건입니다. 사건의 내용과 경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부흥부 장관이던 오영재가 부인인 안순애와 이혼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안순애 여사를 간통으로 고소하고, 검사가 안순애 여사를 간통혐의로 구속기소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안순애 여사의 변호를 이태영 여사가 담당하게 되었고 결국 이태영 여사의 변론에 힘입어 안순애 여사는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이 사건은 공판이 있는 날은 법원 일대의 교통이 통제되고, 방청권을 교부받아야만 공판정에 입정할 수 있을 정도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이태영 여사님에게 변호사라는 직업은 천대받고 억압받는 여성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 법률상담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무료 법률상담소가 바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입니다. 그러나 무료 법률상담만으로는 1950년대의 남녀 차별적인 법조항을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태영 여사님은 여성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던 민법중 가족법 분야에 대한 개정운동을 펼쳐 3차례에 걸쳐 가족법의 개정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가족법 분야에 있어서 남녀평등 구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간통죄를 남녀 모두 처벌 받는 남녀 쌍벌주의로 개정되도록 하는데 이바지 함으로써 양성평등원칙이 형법에서도 구현되게 하는데 이바지 하셨습니다. 당시 이태영 여사님이 법개정운동을 펼치자 당시 대법원장이 이태영 여사님을 보고, '법조계 초년병이면서 건방지게 법을 고치자고 나서다니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태영 여사님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법개정 운동에 참가하셨는지를 단적으로 설명해 주는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태영 여사님은 라몬 막사이사이 상을 비롯하여 인권옹호상, 국제법률봉사상, 여성을 돕는 여성에게 주는 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상하셨으며 저술로는 <어떻게 할까요>,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 <나의 인생, 나의 만남>, <가정법률상담 실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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